
연연불망:그리움으로 떠나는 꿈의 여행
W.로랑규
또다시 짙은 그리움이 찾아오면 나는 너를 떠올리며 이 밤을 헤맬 거야. 젖어든 방에 햇살이 찾아들어 이 마음을 두드리면, 새롭게 만날 나의 연을 떠올리며 하루를 살아갈 거야.
탁.
책상에 앉아있던 정국은 펼쳤던 책을 덮었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 정국은 곁눈질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바늘은 새벽 3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밤이네."
정국은 작게 속삭였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자, 꽤나 정이 들었던 햇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어둠까지 뜨겁게 불태울 것처럼 빛나던 태양이, 촛농이 다 녹아버린 애먼 촛불을 빗대며 차갑게도 서린 달의 뒤로 숨어버리는 밤이 찾아오면 나는 오늘도 너와 함께한 수많은 여행길에 오르고는 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꿈꾸는 하나의 자각몽들이 되기도 하겠지만…
“훗-”
한 명의 몽상가가 되는 점도 나쁘지는 않다랄까.
뭐가 되었든 간에 내가 오른 이 여행길은 전부 다 사실을 빗댄 것들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곳에서 만나는 너는…
<1387년, 조선 -정아, 사랑하는 만치 그립구나.>
“도련님-! 소인, 말씀하신 서책을 전부 구해왔습니다. 어서 기다리신 분에 마땅한…! 으왓!”
철푸덕!
보따리에 서책을 가득 넣어 뛰어오던 태형이 길가에 솟아 올라와 있던 돌부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투두둑. 툭.
보따리에 있던 매듭이 약했던 탓인지, 태형이 넘어지면서 하늘을 날았던 책들이 전부 엎어진 태형의 등 위로 떨어졌다.
“으으….”
아무래도 전방주시를 너무한 탓인가……. 태형은 지난날의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우리 도련님에게 소중한 서책들을 가져다드리려는 마음이 컸을 뿐이었는데…….
“괜찮은 것이냐?”
“…에?”
하늘에 높이 떠있는 태양을 가린 채 선 정국으로 인해 태형의 몸 위로 그림자가 졌다. 멍청한 소리를 작게 낸 태형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정국을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허어…. 어찌 이리 심성이 고우실 수가 있으신 걸까. 본인의 소중한 서책을 이리 함부로 하였는데도, 하인인 나를 걱정하는 태도시라니. 역시 우리 도련님은 성품에 이어 인물상까지……!
“정말 참으로 말썽쟁이가 아니라 말할 수가 없구나.”
그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변한 태형의 표정을 통해 생각을 읽어낸 정국이 특유의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이리 조신하지 못할 수가 있는지.”
어찌 보면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일관될 수도 있었으나, 오랜 세월 정국을 모셔왔던 태형은 단박에 이것이 저를 향한 걱정임을 알아챘다. 그로 인해 태형은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도련님이야말로 참으로 인자하십니다. 어찌 이런 저를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서도 내치지 않으신답니까?”
“…….”
정국은 태형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태형의 몸 위에 있던 서책들을 전부 주워서는 보따리에 다시 담아냈다.
“어찌 사람을 그리 쉽게 내칠 수가 있겠느냐?”
이번에는 풀리지 않도록 더욱더 단단하게.
“정이라는 건 그리 쉽게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몸을 일으킨 태형의 품에 보따리를 도로 안겨주며 정국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더냐?”
태형은 정국이 여며준 보따리를 내려다보다, 이내 정국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허면 도련님께선 제게 정이 드신 겁니까?”
어떻게 보면 가볍게 전했을 질문이었는데도, 쉽사리 그에게 전해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의 너는 나에게 있어 하인에 불과한 사람이었음에도.
“…깊은 정이다. 그 누구에게 아무리 설명한들, 그 깊이를 이해하진 못 하겠지.”
그때부터였을까, 운명의 점이 하나로 이어진 건.
내가 끝없는 이 여행길에 빠지게 되었던 것도.
<1938년, 일제강점기 -동지, 이 어색한 하루가 부디 빨리 끝나기를 바라오.>
“안 됩니다! 또다시 헛된 죽음이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앞서 떠난 동지들을 생각하신다면…!”
탁.
흥분에 날뛰고 있던 정국의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우뚝, 말을 멈춘 정국이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20대의 모습을 갖춘 정국과는 다르게 좀 더 성숙한 모습을 지닌 태형이었다.
“헛된 희생 같은 건 없네.”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바라고 행하는 거라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예,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죽음들이……”
정국의 어깨를 쥔 태형의 손에 힘이 실렸다. 저도 모르게 떨구어지고 있던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본 정국은 그의 결단에 실린 눈빛과 마주하곤 흠칫하며 작게 몸을 떨었다.
“현재 우리에게 있어, 두려움이란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아.”
“…….”
“간절함…. 간절함 하나만 품고 가는 걸세.”
굳게 실린 태형의 의지를 마주한 정국은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은… 그 간절함이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그 간절함 속에 두려움은 정말 없으신 겁니까.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이 정국의 마음 안에서 울렸다.
“믿는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거란 것을.”
그 믿음에 보답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마음속 언저리에 있던 두려움들이 간절함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왜곡된 간절함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무사하십시오.”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동지.”
“爆弾だ!! 今すぐあのテロ犯を捕まえて!! (폭탄이다!! 당장 저 테러범을 잡아!!)”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도……
“형님!!!”
덜컹. 쾅!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정국으로 인해 힘에 밀린 의자가 벽에 큰소리로 부딪혔다.
“헉… 헉….”
하지만 그 소리에 신경 쓸 틈이라고는 없었던 정국은 호흡을 급하게 들이쉬며, 가빠진 숨을 정상으로 돌리는데 애를 쓰고 있었다.
“야…… 전정국. 너… 괜찮냐?”
한참 공부에 집중하던 놈이 엎어져 잠들어버리길래…. 이 놈도 인간이기는 했구나 하며 내버려 뒀는데, 이런 식으로 깨어날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정국의 행동에 많이 놀란 표정을 한 천수가 정국의 옷자락을 잡았다.
“…….”
아무런 대답 없이 천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주위를 살피던 정국이 헛프게 웃음을 내비쳤다. 하, 나참… 꼴에 이것도 악몽이라고. 이것도 몇 번이나 만났던 김태형인데.
“정국아?”
“아, 선배. 괜찮아요. 요새 다른 시험 준비하느라 잠을 별로 못 잤더니…”
“그래? 하긴… 며칠을 학교에서만 밤을 새우더니. 몸 좀 살피면서 해.”
“그럴게요. 선배, 저 30분만 잘게요. 이따가 깨워주세요.”
“어어, 그래. 좀 자. 내가 깨워줄게.”
“감사해요.”
대충 몸을 눕힐 수 있을 만한 공간에 온 정국은 바로 몸을 뉘었다.
며칠…….
그래, 한동안 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었지.
1938년, 한 생명을 뜨거움과는 비례하게도 차가운 죽음으로 내몰아가는 붉은 피를 두 손으로 막아내며 어떻게든 그의 죽음을 막아보겠다고 애써보던 날이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꽈아악-
정국은 멍하니 시야에 담고 있었던 손을 주먹 쥐었다. 환상처럼 가득하던 피로 물든 손이 흐려진다. 아마도,
탕-!
“狡猾な朝鮮のやつら。(교활한 조선놈들.)”
털썩.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이질적인 진붉은 핏물이 물들어갔다. 먼저 심장에 총을 맞아 숨을 거둔 사내의 것인지, 머리에 총이 꿰뚫어질 때까지 두 손을 붉게 물들인 청년의 것인지는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그때의 순간들은 참으로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여행길에서 만나는 너의 모든 모습을 전부 사랑하고 있는 나였기에.
나도 모르는 순간에 이른 나의 결심이… 아직 무르지 않았기에.
모든 순간의 너를, 어떤 모습이든 간에 너이기만 한다면 네 모든 걸 다 사랑하겠다는 마음만은 죽지 않았음을 알기에, 이 여행의 끝맺음을 짓지 않았다.
<1988년>
“너는 왜 매번 사사건건 불만이 그리도 많냐. 형사가 범인을 잡는 게 당연한 거지.”
불만을 많이 품고 있는 걸로 보이는 태형의 얼굴을 마주한 정국이 태형의 앞쪽으로 고개를 쭉 내밀며 말을 걸었다.
그런 정국에 태형은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내뺐다.
“전 어차피 빨리 이곳을 떠날 겁니다. 하…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제가 이런 깡촌에 전출을 오는 일은 없었을 거니까요.”
“서울이 그리도 좋나?”
“예, 제 꿈의 시작은 애초에 서울이었습니다.”
“흐음.”
숙였던 몸을 바로 한 정국은 추적추적 내려오는 빗줄기를 말없이 바라봤다. 참으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군.
“선배님은 이런 깡촌이 좋으십니까?”
“나?”
“네, 깡촌 주제에 뭔 놈의 잡다한 사건은 이리 많은지…. 정이 들라고도 안 듭니다!”
여전히 불퉁한 표정 그대로인 태형의 표정을 본 정국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국을 돌아보던 태형이 이내 다시 표정을 구겼다.
“지금 저 비웃으시는 겁니까?”
“크큭… 풉. 하하, 그럴 리가. 나도 사건이라면 질색인걸?”
“선배님도요?”
“그래, 니가 말했듯이 이런 깡촌에서 사건 하나 터지면 얼마나 골치 아파. 마을도 작아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마주치면 또 다른 골칫거리니까.”
“…….”
“그래도 뭐, 사람에게 있어서 정이라는 걸 어떻게 떼어놓냐. 그거 없으면 못 살지도 몰라.”
말없이 정국을 올려다보던 태형은 몸을 일으켰다. 간간이 들리던 빗소리가 매우 매서웠다.
“선배님도 서울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음… 뭐, 그랬지.”
“그런데 어째서… 서울로 다시 돌아갈 마음을 접어버리신 겁니까?”
태형은 정국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고작 정이라는 것 때문에 서울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만들지 않기에는… 버려지는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태형과 말없이 눈을 마주하고 있던 정국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매서운 빗줄기들을 맞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이런 깡촌이나… 비 내리는 건 다 똑같거든.”
“네?”
알 수 없는 정국의 말에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태형의 표정이 옅게 구겨졌다.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정국의 옆얼굴을 쳐다보던 태형의 시선이 축축이 젖어들어간 정국의 손끝으로 옮겨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시작과 그 끝이 꼭 같은 곳일 필요는 없다는 거야.”
“…….”
“오히려 너무 같은 곳에만 머무르다 보면, 익숙한 것들만 쫓아가 버리게 되기도 하거든.”
손을 거둔 정국이 태형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지 태형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물론, 그 마음을 접었던 건…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전출 오게 된 김태형 순경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회상 장면을 떠올리며 정국은 더 진한 미소를 입에 담았다.
몇 달도 채 되지 않았지?
<1990>
“…좋아해요.”
…사랑을, 해버렸다.
“야… 너는… 어떻게 고백을……”
그래, 내가 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이 순간의 기억 때문이었지.
“살해현장에서 하고 그러냐…?”
답지 않은 공간에서, 답지 않은 말들과, 답지 않은 모습이 그리워서.
<1993년 -너와, 나와의 이별이 슬프지 않았으면.>
“전 형사님!!”
또 가끔은 너를 두고 떠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형사… 전 형… 흡, 그, 흐윽…”
내 몸을 잔뜩 적신 핏물보다, 시작은 맑았으나 끝에 닿아선 더 붉게 물들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그의 눈물이 너무 애달팠다. 하지만 미어지는 가슴에 온전히 너를 안아주지도 못하는 그런 날의 설움보다는,
“…있지, 다음에 다시 만나도, 내가… 이 모든 추억, 다, 다… 간직하고 있, 을게.”
내가 떠난 하루들 속에서 울음 지을 너를, 더는 달래줄 수 없다는 사실 하나에 더 목이 메어와서…
“안 돼!!!”
편히 눈을 감지 못한 그런 날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만남에 목메이지 말기를.>
“정국아. 정국아? 이제 일어나. 강의 시간에 늦겠어.”
번쩍.
몸에서 느껴지는 약한 진동을 느낀 정국이 재빨리 두 눈을 떴다.
“얼른 준비하고 강의실로 와.”
정국이 일어난 걸 확인한 천수는 먼저 몸을 일으켜 강의실로 향했다.
천수의 뒷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던 정국은 핸드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8시 40분….
벌써 떠났던 여행을 정리할 때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능숙하게 강의실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방금 전까지 오랜 길의 여행을 떠났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탁.
미련 없이 기숙사에서 나온 정국은 강의실로 향했다. 왜인지 가는 길마다 태형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가득 떠오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이르지만, 목적을 잃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또 새로운 너와 여행길에 오르겠지.
다시 너와 함께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또 꿈이란 여행에 젖어든 하루를 살아간다.
꿈에서 깨면 또 원래의 하루가 변함없이 흘러가겠지만,
어쩌면 이 여행을 그리워하며 밤이 되기를 간절히 빌기도 하겠지만…
“저, 혹시… 여기 자리 비나요?”
또다시 변화의 틈이 내게 다시 찾아온다면.
“아, 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간절히 두 손에 모아,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요? 전…”
늘 그래왔듯이,
“김태형이요.”
새롭게 만난 너를 사랑할 거다.
Creater's Note
꿈을 꾼다'는 걸 여행에 빗대어 써봤습니다.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끝없는 꿈을 꾸는 게, 마치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의 모습 같았습니다.
여러분도 밤이 오면 작은 여행 꼭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